나답게 살다 나답게 죽고 싶다 _ 하시다 스가코
작가는 '오싱'의 극본가다. NHK의 일년짜리( 현재는 반년이다) 아침드라마를 네 편을 썼고, 대하 드라마는 세 편.
20년동안 500화를 방영한 드라마를 쓰기도 했다. 1925년부터 살아왔고 전쟁을 경험했다. 이 책의 초반에 전쟁에
대한 기억들이 실려있는데, 나는 일본인이 전쟁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을 보기 전에 항상 경계한다. 이게 이 작가와
마지막이라는 각오를 늘 하고 있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대체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 한 구절이라도 등장한다면 책을 덮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말을 하자면 이 책은 괜찮다. 그런 불쾌감에 대비하면서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마음 놓고 읽어도 된다.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왜 하는지도 안다. 하지만 그것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의 의견이나 창작물은 소비하고 싶지 않다. 굳이 왜? 안 그런 작가들도 많고, 세상은 넓고
책은 읽어도 읽어도 끝이 나지 않는데 굳이 왜?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한 종활 일기'라는 부제가 있는만큼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있다. 강하게
각인될 정도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역시나 경력에 맞는 글솜씨로 풀어내고 있다. 각본가로서 엄청난 이력을 가진
작가였지만 텔레비전으로 들어온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 때문이었다. 그는 쇼치쿠 각본 연구생이 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었다. 1200명이 지원했는데, 입사한 사람은 6명. 그 중에 여성은 자신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회는 전혀 오지 않았다고 한다. '쇼치쿠의 첫 여성 각본가'가 되었지만 영화 감독은 여성과 일하는 것을 거부
했다. 선배 각본가 집 애완견 산책을 시키고 사모님이 시키는 설거지와 청소를 했단다. 차를 대접하고 회식에서 술
따르는 일은 전부 자신의 몫이었다고. 비참했단다. 그래도 버텼지만 10년이 넘어서 비서실에 발령받았을 때 그만두었
다. 그리고 마침맞게 시작되고 있던 텔레비전 시대에 몸을 실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손절의 중요성과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시류를 감지하는 판단력의 가치을 배웠다. 나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기회를 주지 않은 것 같은 판은 재빨리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가야 한다. 그런 곳에서 허비할만큼 인생은
길지 않고 세상은 넓다.
자신이 쓰는 드라마가 이류라고 생각했고, 그걸 쓰는 자신도 이류라고 했다. 일류가 되면 괴로울 테니까, 이류로서 마음
편히 살기로 한 것 같다. 하지만 이류로서 지켜야 할 것을 관철했다. 마감을 어기지 않는 것. 마감을 어기는 것은 일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류인 자신은 마감만큼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래왔다고 한다. 그리고 살아남았단다.
이토록 멋진 이류정신이라니, 이 작가를 이제서야 만난 게 아쉬워서 검색을 해봤더니 '오싱'과 과련된 책이 잔뜩
나왔다. 어린이를 위한 오싱도 있더라. 그 외에는 '그리고 안락사를 부탁합니다'였는데 목록이 심상치 않아서 읽어볼
예정이다. 이 책과 비슷한데 심화버전이라는 예감이 들어서.
열심히 일을 했고 결혼을 했다. 평생 파트너로 함께 일했던 프로듀서를 겁박해 남편을 소개받았다고. 그런데 남편이
마마보이였단다. 시어머니에게 죽을 때까지 나이를 속이기까지 했단다. 4살 연하가 뭐가 대수라고. 하긴 그 시대에는
대수였나보다. 마마보이면서 가부장적인 건 또 뭔가. 남편 역시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음에도 자신은 각본가와
결혼한 게 아니니까 자신이 보는 앞에서 원고를 쓰지 말라고 요구했고 그걸 들어주었단다. 그러면서 새벽까지 술에
취해 동료를 끌고 집에 들어와 차밥을 내와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가는 늦은 귀가에 오히려 신났던 거 같다. 맘껏
원고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 가부장적이면서 마마보이인 남편은 소원대로 어머니와 함께 묻혔다고 한다.
아이를 갖고 싶어서 한 결혼이었는데 아이는 없다. 평생 파트너였던 프로듀서 손에 이끌려 결혼 전에 자신에게
불임사유가 없음을 증명하기도 했었다고. 그럼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의사가 남편도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는데
상처가 될까봐 말하지 않았다고. 그건 작가에게도 그 과정이 몹시 상처였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싸울 수 있어서 결혼한 건 잘 했다고 생각한다고. 프로듀서나 감독이 수정을 요구했을 때 부당해도 꾹
참았는데 고정소득이 있는 남편과 결혼하면서 자유롭게 때려칠 수 있었다고. 그 이전에는 생계가 달려있어서 꾹꾹
참았다고. 결혼 후에는 맘껏 쓰고 싶은대로 썼다고한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더 좋은 평가를 얻었고.
결혼이란 거대한 단점이 있음에도 긍정적인 점도 있긴 하다는 것을 알게 되긴 했다. 안심하고 맘껏 싸울 수 있는
기반이 생겼고, 맘에 안 드는 캐릭터를 잔뜩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관계의 확장을 손에 넣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없었더라도 이 작가는 왠지 굉장히 잘 살았을 거 같다. 재테크를 통해 고정수입을 늘리고, 인간군상에
대한 관찰은 다채로운 간접경험이 있으니까 괜찮았을 거다. 여행도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남극과
북극도 다녀오고 크루즈 안에서 글을 썼다고 하는데 결혼생활이 부재했다면 사막횡단과 아마존 탐험까지 하지
않았으려나 싶었다. 어쩌면 이미 했을지도.
인생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죽음에 대한 것이다.
존엄을 지키며 죽는 것, 그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소재였다. 이 한 권의 책에 실려있는 이야기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기 위해 깔아둔 복선이었다는 듯 책의 마지막 파트에서 본격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해서 나름의 결론을 내린 작가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죽음은 영면, 끝없는 잠일
뿐이라고. 죽어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는 작가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나름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그 생각에 맞는 제도가 아직 일본에는 없어서 이 책을 쓴 게
아닐까 싶다. 의견을 모으고, 그 의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한번씩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
이 책에는 죽음에 대한 몇 가지 물음이 실려있다. 그걸 채우다보면 자신이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전보다는 또렷해진다. 그것에 의지해서 생각을 확장해나가면 된다. 그걸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