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트라비아타 _ 이부키 유키
푸른 봄, 붉은 여름, 하얀 가을, 검은 겨울. 이게 인간의 네 가지 계절이라고 한다
작가는 여름의 끝자락 즈음을 두 사람을 세워놓았다. 39살이면 여름의 끝자락이라는 걸까. 예전에는 인생을
계절에 비유할 때 그러려니 했었다. 인생에 무엇에 비유하든 그건 표현자의 자유니까. 하지만 요즘 들어 의문이
든다. 어째서 노년을 꼭 겨울에? 봄처럼 안온한 빛을 띄며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을텐데. 겨울처럼 칼바람이 부는
시기를 살아가는 어리고 젊은 사람도 있을테고. 나이에 따라 줄을 세우듯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니 이런 발상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나 마음에 들었었다. 책을 정리할 때도 최후의 최후까지 가지고
있었던 소설 중 하나였고. 그말인즉 이 책을 이미 홀랑 팔아버렸다는거다. 오늘 올해를 보내며 새해를 맞이하기
직전에 하는 정리/청소 대환장파티를 하고 있었다. 파일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예전에 써놓은 책감상이 있어서
한참을 망설이다 열어봤다. 예전에 내가 쓴 글을 읽노라면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냐 억울해지니까. 대충 열어서
쓱쓱 읽다가 빛의 속도로 영구삭제를 하곤 했었다. 이번에도 그걸 예상하며 멈칫거리면서 문서를 열었는데
이 책의 감상문이 튀어나왔다. 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트라비아타
그걸 보고 어쩐지 다시 읽어싶어져서 뒤적뒤적 서점사이트를 뒤졌더니 품절이었다. 이북도 없었다. 이 작가의 다른
책은 있는데. 이 책보다 이전에 출간된 것임에도 있었다. '49일의 레시피' 이 책은 작가가 이름을 알린 작품으로
드라마화 되기도 했었다. 드라마에서 청소법이나 살림의 지혜같은 걸 제법 알려줬었고, 드라마에 부인역으로
나온 배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즐겁게 봤었던 것 같다. 드라마화된 그 책은 여전히 있건만, 이 책은 데뷔작.
데뷔작이지만 꽤나 재미있는데. 소재도 독특하면서 따스하기도 하고. 페코짱이 얼마나 매력적인데.
하지만 세상은 이름을 날린 책들만 재고가 확보되어 있는거다. 냉정한 출판/도서 시장이다. 이북으로 나오면 좋을
것을. 어쨌든 지금은 이 책을 종이책으로도 이북으로도 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찾아내었다. 이 책이 있는 도서관을. 품절된 책은 반드시 도서관에 있다. 이 책을 읽고 싶다면 가까운
도서관에서 찾아보자. 근처에 없을수도 있다. 그럼 구로 넓혀서 같은 구내의 도서관을 뒤진다. 그래도 없으면 다른
구에서 찾으면 된다. 이도저도 방법이 없다면 거기에 가면 된다. 국립중앙도서관. 여긴 최후의 보루다. 그 전에
대체적으로 찾아내진다. 아직까지 책을 찾다가 저기까지 가 본 적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일단 집근처 도서관부터
인터넷으로 방문해보자.
이건 내가 기록해두었던 책감상기를 토대로 재구성해보았다.
테쓰지는 요양을 겸해서 어머니의 집을 처분하려고 미와시에 내려와 있었다. 모친 상을 치르고 나서 회사 앞 역
앞에서 목이 오른쪽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장기 휴가를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집에서 몹시
삭막하고 느긋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어느 날 패스트푸드가 몹시 먹고 싶어졌고, 차를
빌려서 저 멀리 가게로 햄버거를 사러가는 길이었다. 그 맘 잘 안다. 버거킹이나 맥도날드를 차를 타고 나가야
만날 수 있는 나는 그 맘 잘 안다. 번화가에 나가서 가끔 버거킹이나 맥도날드에서 우걱우걱 햄버거를 먹는 나는
이해할 수 있다 테쓰지가 차를 몰고 패스트푸드를 찾아나선 것을. 맥세권이나 킹세권에 사는 사람들은 이 맘을
모를지도. 좋겠다. 몰라도 좋을 마음이니까.
그 길에서 만났다, 페코짱을.
사람들이 페코짱이라고 부르는 키미코. 화물운전을 하는 사람들에게 알음알음 퍼진 소문이 있다. 페코짱을 만나면
복을 받는다고. 돈복이 잔뜩 붙고, 엄청난 재력가와 재혼해서 돈방석에 올라앉고. 그러고보니 대체로 돈과 관련된
복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페코짱은 정중하게 대한다. 행운의 페코짱.
하지만 정작 페코짱으로 불리는 키미코는 자신은 여러가지 쓰고 아픈 인생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매년 여름이
되면 미와시로 스미듯 찾아온다. 행복과 슬픔, 애잔함이 뒤섞여있는 이 복잡한 감정이 고여있는 이 곳에서 여름의
한 때를 보내기 위해서. 이번 여름도 그리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테쓰지를 만나면서 그 예정은 한참을 벗어나게 된다.
그들의 첫만남이 어땠냐고? 첫눈에 반한 건 절대 아니었다. 우연히 차를 태워주고, 차를 얻어탄 사이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인연의 작은 시작점이 되었다.
테쓰지는 자살을 시도한다. 충동적으로 바다에 뛰어들었고, 그 모습을 발견한 키미코에 의해 구조된다. 그리고
키미코는 테쓰지를 보살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대신 테쓰지는 키미코에게 클래식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그녀의
아들이 항상 들었던 그 음악을. 듣고 싶었어도, 도저히 들을 수 없어서 듣지 못했었다. 시간이 흘러 들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클래식에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며 다가가지 못하고 부근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음악을 테쓰지의 도움을 받아서 키미코는 드디어 듣게 된다. 그리고 올바른 대가관계에 대한 확실한 철학을
가진 키미코는 정성을 다해서 테쓰지를 챙긴다. 그가 살고있는 곶의 집을 정돈하기도 하고. 바닷가의 그림같은
집에서 그의 센스있는 어머니가 남긴 음반을 듣고 책들을 읽으며,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서
서로의 좋은 점을 알아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테쓰지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었다. 붕괴 직전이긴 하지만 어쨌든 부인이 있고, 아이가 있다.
그를 사랑하지만 키미코는 그의 가정이 망가지는 걸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떠난다. 이러면 몹시 신파같지
않은가? 결국은 불륜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당사자는 그걸 사랑으로 굳게 믿고 있으며, 그게 진실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가정을 위해서 마음을 접는 한 여자라니...! 하지만 이 소설이 이해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 속을 떠도는 괴상한
이야기라고 한켠으로 밀어둘 수 없는 건, 서른 아홉 살에 찾아온 로맨스를 아기자기하게 꾸려나가는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설레어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제대로 결정을 내리는 것일까 망설이고 고민하고, 때로는 상대방을
위한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속이는 결정을 내리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용기를 내리는
과정이 이 소설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까.
캐릭터들의 매력으로 이 책은 불륜 치정극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비록 테쓰지의 부인이 옴팡 악역을 뒤집어
쓰기는 했지만. 지금 되돌아 생각해보면 부인에게 이 책의 모든 악한 역할을 몰빵한 거 같다. 그 부인 외에는 모두가
굉장히 순수하고 선량하고 올곧고 강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초반에 바다에 투신하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상처로 크고 작은 흉터를 잔뜩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마주보고 웃을 수 있는 시간들을 그려내고
있어서 이 책은 지금도 꽤나 좋은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다. 키미코가 테쓰지에게 만들어주던 음식들도 굉장히
맛있어보였고. 갓 튀겨낸 뜨끈뜨끈한 감자튀김이라던지, 치킨난반, 손님초대를 위해 만들었던 맛있는 음료들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에 나왔던 음악과 함께하고 싶다. 물론 마지막은 오페라로
해야겠지. 라트라비아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