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 게렌발은 철저하게 자신의 경험담을 그리는 작가다. 그리고 그것을 그려내기까지 작가는 얼마나 많이

과거로 되돌아갔을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상처는 봉인하고 없는 척 하는 것, 어리석지만 쉬운 방법이다.

물론 미봉책이라 언제 어디에서 터질지 알 수 없다. 작은 시한폭탄을 가지고 두근거리며 살아가게 된다. 운이

좋으면 터지지 않는다. 하지만 운이 나쁘면 높은 확률로 터진다. 그리고 그건 대체로 상황이 나쁠 때이다.

상황이 좋게 좋게만 흘러간다면 괜찮겠지만, 인생사가 그렇게 개인에게 유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힘들어

죽고 싶을 때 더 힘들라고 그 작은 시한폭탄은 빵하고 터져준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했고, 피가 철철 흘러넘치도록 싸웠다. 물론 매번

피만 많이 잃고 패했다. 그가 갈구하던 것은 쉽게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끝이 없어보이는 싸움에서

결코 좌절하거나 단념하지 않는다. 매번 다치고 상처입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반작용이 엄청났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이 이 책이 아닐까 싶다. 

 

 

그 과정에서 느꼈던 것들, 깨달은 것들을 작품을 통해 그림과 언어로 풀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책이 되었고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은 그의 경험과 성찰을 공유할 수 있다. 그의 경험을 발판으로 우리는 그가 했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에서 그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인터뷰를 보며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것처럼

우리 역시 이 책을 읽으며 그가 선택한 방법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게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먼저 경험한 이들의 기록을 발판으로 좀 더 나아지기 위해서.   

 

 

'7층'의 경우는 데이트 폭력을 다룬 책이다. 그가 만났던 남자친구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를 고립시키고

학대상황에서 옴짝달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어째서 그가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는지,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상황에서 자포자기하게 되었는지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자동차 운전 중에 남자친구가 운전을 하는 그의 손가락을 뼈가 보일 때까지 물어뜯고 그 살점을 삼켰을 때,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된다. 그리고 구조를 요청한다. 아버지와 교수님에게 연락을 하고, 학교를 통해 도움도 받는다.

그의 작품으로 추론해본 작가와 아버지의 관계로 짐작해보건데 이런 상황이 되면 무정한 아버지라도 적극적으로

딸을 돕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교에 소속되어있다면 교수님을 비롯하여 학교 시스템으로 최소한의 조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지금보다는 좀 더 후졌었다. 피해자를

다그치는 게 쉽사리 일어나고 있었고, 가해자는 스리슬쩍 피해나갔었다. 가해자인데도. 그리고 그렇게 방치된 채로

시간이 흘러 여전히 사회기사면에서 여자친구나 배우자를 살해한 쓰레기들의 기사를 보곤한다. 얼마 전에서 봤었고.

사회 시스템에서 방치된 범죄는 세를 키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 한번의 방치가 일어난다면

다음번은 무엇이 될 것인가. 그리고 조금 신기하기도 하다. 살인이나 강력범죄에 대한 약한 처벌이나 처분을 볼 때면

그 과정에서 관여한 모든 사람들의 법과 도덕에 대한 인식상황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한다. 저 정도는 해도 괜찮다고,

일어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본인이 직접 겪을 일이 아니면 상관없단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시스템을 구축하고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머리카락을 쭈뼛해진다. 이 사람들은 이 사회에 더더욱 큰

해악을 불러들일 게 분명해보이니까. 그들에게도 언젠가 그 시스템의 부메랑이 돌아가리라 생각한다. 다만 순번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뿐.

 

 

이 책에서도 그런 가해와 학대의 주체였던 남자친구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작가가 분개하고 허탈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집행유예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식인종이나 짐승처럼 손가락 살점을 뜯어먹었는데 인류의 법이

말랑말랑하게 적용되어 사람들이 살아가는 거리에 풀어놓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살점을 뜯어먹는 위험인을

풀어줄 수 있는걸까 여전히 의아하다.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는 작가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학대에 대한 경험을 들려준다. 스웨덴의 경우

79년에 이미 육친에 의한 신체체벌이 법률로서 극복되었다. 그러니까 작가는 부모님에게 신체적 학대를 경험한

적이 없다. 뺨 한대를 엄마한테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때리고나서 엄마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 다음은 결코

없었다고 한다. 법률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률이 규율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그 틈을 타서 학대는

존재하더라고. 작가도 시간이 많이 지난 이후에 정신과 상담을 받다가 알게된다. 자신이 경험했던 것이 정서적 학대

라는 것을. 이름이 붙으면 참 좋아진다. 거기에 대한 해결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문제점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니까.

하지만 작가는 이름이 붙기 이전 시절을 살아야했다. 작가는 보통의 사람들이 쉽게 얻을 수 있었던 부모의 애정을 

받지 못했다. 비극은 어린 아이는 부모의 애정을 갈구할 수 밖에 없다는거다. 그 역시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끌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지만 그의 부모는 강적이었다. 꿈쩍도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작가는 자기혐오라는 

짐도 져야 했었다. 끝없는 부모의 후려치기 속에서 작가는 시들어간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런 상황에서 20년

이상 방치되면 망가진다. 그리고 어딘가 고장이 난 채로 그 이후의 삶을 살아야한다.

작가도 자신과 부모와의 관계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늘상 그런

이야기는 듣는다고한다. 그래도 부모인데. 부모님과 잘 지내야지. 스웨덴이나 여기나 사람 사는데는 다 비슷한가보다.

자신의 경험치가 보통이고 기준이라, 거기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게 선량한 사람들은 2차 가해에 나선다. 3차 가해도 하고. 도덕적이고 바른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정서적

학대로부터 무지한 이들이었다. 잘 모르면 가만있으면 되지 자신의 기준에 합당할 정도를 지키지 않으면 자신의

세계가 깨져버릴 듯이 안달을 하는 사람들이 저쪽에도 존재하나보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런 상황에

대한 가정을 전혀하지 못하고 입으로 이런저런 충고라는 이름의 주절거림을 당사자 면전에 내뱉는 건 지능문제같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더 심하지 않을까 싶다. 효문화가 중시되고 있으니까. 정말 중시하고 있는지 의문이 많이 들기는

하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부모가 자식을 살해한것보다 훨씬 큰 비난과 법적 책임을

짊어지게 된다. 부모가 자식을 살해하는 것도 그만큼 나쁘지 않나. 힘없고 약하고 어리고 물리적으로도 작은 생명체를

공격하는 피붙이 혈육이라니 패륜자식만큼 비난받아 마땅한 것 같은데 어쩐지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강약약강의 사회라서 그런 것일까. 약한 것들은 보호받지도 못하고, 범죄의 대상이 되어도 그 정도 처벌로 충분하다는

것일까. 작은 아이를 때려서 죽인 사건을 바로 며칠 전에 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아직까지 물리적 폭행에서도 아동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곳에서 살고있어서 참담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서적 방임과 학대까지 보호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그리고 그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가 될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그 끔찍한 시간들을 우리 사회는 방임하고 있다.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지만 가정사나 개인사라는 이유로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는 폭력의 폐해, 그것이 이 작가가

다루는 주 내용이었다. 인생은 힘들다. 하지만 저런 폭력에 노출된 인생은 더더욱 꼬인다.

'시간의 지키다'는 폭력을 각성한 이후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 이후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게 되는지를 아주

약간만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살아간다. 배우자를 만났다. 소울메이트는 아니지만 서로의 인생에서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나 아이도 둘을 낳아서 기르고 있다.

 

 

그런데 십년동안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단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떻게 설명할거냐고. 잘살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런 글을 쓸거냐고. 정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 싶지만 작가가 있다지 않는가. 무슨 상관이지 싶지만.

언제까지 이런 글을 쓸거냐고 물을 정도라면 그 작가한테 관심을 끄면 그만이고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 그것만으로 설명은

충분할 거 같은데. 독서는 원래 그런 것이니까. 작가가 엄마이니까 평범에서 넘치는 독자 서비스를 받을수 있을지는 모르

겠지만, 의무는 아니다. 작가가 알아서 하겠지. 남의 자식일까지 간섭질하는 오지라퍼들이 북유럽에 많은가보다. 인생이

심심한가보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거고, 작가가 본인의 인생을 정리해서 책을 냈다고해서 저런 간섭이

섞인 질문을 받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이 작가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스타일의 글을 쓸 거 같은데, 언제까지 이런 글을

쓸거냐고 물어보는 건 은퇴를 종용하거나 대대적인 작품생활의 대변혁을 촉구하는 것인데. 게다가 이런 글을 아이들이

읽으면 어떻겠냐니. 타인에게 보여서 문제가 될 글을 출판할리가 없지 않은가. 아이가 읽어서 큰일 날 내용이었나 괜히

작가의 다른 책을 떠올려보게 된다. 아이가 읽는 게 뭐가 문제라는건지 도통 모르겠다. 진짜 뭐가 문제라는거지?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이후로 부모님과의 관계 회복은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 뒤로도 새로운 시도를 계속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맞다. 아이가 생겼으니까. 자신은 실패했지만 아이를 계기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보려했던 듯 하다.

자상한 할아버지와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들이 안정되고 충만한 관계를 갖기를 바랐던 것 같다. 자신이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런 평범함을 아이들에게는 이어주고 싶었는지, 아니면 다시 한번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조정해보고 싶었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그런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사람은 안 변한다. 매정했던 아버지가 다정한 할아버지가 될 리가

없지 않는가. 결국은 같은 사람인데. 작가의 아버지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기대를 하면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상처는

갱신된다. 2011년 마지막 크리스마스라는 부제가 있는 파트에서 작가는 이제 영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단념한 거 같았다.

처음부터 전혀 없었던 것을 잃었다는 마지막 문장이 몹시 쓸쓸했다. 하지만 자유로워졌다고.

지금은 2019년. 8년이 지나는 동안 작가가 또 다른 시도를 그 사이에 하지 않았을까. 내가 읽어본 그의 책은 고작 4권 정도

뿐이니 알 수 없다. 작가는 어린 시절에도 부모에 대한 사랑을 갈구했었고, 그리고 그것을 서른이 넘어서도, 아이가 생겨서도

쉽게 좌절하지 않았다. 결핍된 것을 채우려는 것은 본능이고, 사람은 쉽게 모든 것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편한

방향으로 기억을 재편집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마무리를 보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왜냐면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에서 부모와 인연을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지키다'에서 정말 열심히 아버지와의 관계를 재구축하려고 애쓰고 있더라고. 다음 책에서 작가가 또 다시 가족과의

관계에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놀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예술을 만나서 구원받았다고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그 일에서 살아갈 동력을 얻고있다는 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애 최초의 인간관계가 엉멍이었고, 그 뒤로 만난 남자들은 형편없는 인간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인간불신에 빠지지

않고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도 기르며 살아가고 있다니 작가는 강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강한 사람이 어떤 메세지를 주려고 했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결국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로 연결이 된다.

내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아수라장을 피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무슨 책을 읽게되든 결국은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생각에 머무르게 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결국은 여기에 도달

하게 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다음 단계로. 이 단계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으니까.

 

 

 

오사 게렌발 책은 모두 추천한다. '가족의 초상'은 조금 애매하다. 제일 좋았던 책은 역시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였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자주 본다. 내다버리고 싶은 가족 이야기. 특히나 철없는 부모에 대한 이야기. 좋은 부모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고있다. 하지만 그걸 모든 사람이 갖는 건 아니다. 완벽한 부모는 없고, 그 중에는 형편없는

부모들도 있다. 오사 게렌발 작가의 경우처럼. 그건 부모의 문제이지, 자식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에게 너무나도 부족한 애정을

받아서 갈증에 시달렸던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보기도 했고. 하지만 그들은 쉽게 부모의 손을 놓지 못하

더라. 이 책의 작가와 비슷한 과정을 끝없이 지속하고 있었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도 그랬다고 하지 않던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도 그랬다.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잘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생애 최초로 만난 타인인 부모를 잘못 만난 대가는 비싸다. 미성년자라는 기간은 생각보다 길고, 그 사이에 어마무시한 영향을

받으니까. 그리고 그 경험은 앞으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는데도 영향을 준다. 그만큼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 하지만 필요 이상의

비용을 치르는 건 개인에게 너무 가혹하다. 적당한 시점에서 자유로워져도 좋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부모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화해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 이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자신만의 결정을 내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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